― 담피르.
미안하단 말이 퍽 어울리진 않네요.
그저 그렇단 표현 좋네요. 좀 빌리겠습니다. 일에 치여 막바지에 교수님 얼굴만 겨우 뵈었으니 그저 그렇다, 좋다 할 것도 없습니다만. 무르익은 자리에 있었어도 아마 저라면 비슷하게 표현했을 겁니다. 편지를 받고 생각한 거지만 누군가가 절 찾았다니 더더욱 교수님 얼굴만 뵙고 나오길 잘했다 싶기도 하고요. 이 이상으로 아는 사람을 만드는 건 질색이라서. 아마 얼굴을 봤다면 더더욱 실망했을 겁니다. 그걸 아니까 이번 편지에 대해서도 싫은 말은 구태여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아직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걸지도요. 물고기 같단 표현엔 동의할 수 없지만, 하여튼. 우리는 성인이 된 지 오래인데도 왜 자꾸만 무엇에서 벗어나고자 하는지.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지 않나요? 성인이라면. 이건 당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고 제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 우리는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만 반복하고 정작 정말로 벗어나진 못하는지. 사실 답은 우리들 자신이 제일 잘 알면서도. 어쩌면 겁나서 그저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래요. 무엇이 그렇게 겁나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답할 수 없겠지만. 그렇게 묻고 답하고 묻고 답하고 꼬리를 물다보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있는 게 사실이네요. 이성 있는 생물은 늘 이렇게 피곤하게 굴어서 골치가 아파.
여담인데. 언젠가 당신한테 1g의 피도 남겨두지 않고 흡혈당한 사람의 시체가 우리 연구실에 오게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부디 그런 일은 없길 바랍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당신도 언젠간 원하게 되는 때가 오지 않을까요? 당신 입으로 미친놈이라 해도, 과거와 현재의 윤리 기준은 분명 다릅니다만 정작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드라마틱하게 변한 윤리 기준이란 또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껏 해야 실험 윤리 정도가 아닐까. 우스갯소리를 해보자면, 헌혈처럼 자원봉사자를 한 번 모집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데요. 당장 저만 해도 연구 및 실험에 동의만 해준다면 어느 정도 피를 제공할 의향도 있고요. ……이것도 우스갯소리이니 진심으로 받아들이진 마세요. 반쯤 농담입니다. 어디까지나.
얼굴 이야기에 대해선 못본 척 하겠습니다.
똑같이 말해볼까요. 글쎄요. 마찬가지입니다. 비밀이라 해도 다른 종족에게 말할 수 있는 건 없고, 그렇다고 같은 종족끼리 애환을 나누기엔 제겐 동족도 없습니다. 감히 제 입에 올리기조차 힘든 비밀이니 어쩌면 제 비밀이라 말할 수조차 없는 거죠. 정말, 평생 단 한 번도 만날 리 없는 상대에게 털어놓는다면 좀 편해질 것 같기도 합니다만. '비밀'일 것을 정말 입에 올린다면 그게 제 것이 될 것 같아 조금은 두렵습니다. 귀찮은 것도 있고요. 생각보다 세상은 좁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어릴 적 당신이 만났을 수도 있고요.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긴 아니죠.
그것 또한,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제 일인데 제가 확신할 수 없다니 연구자로서 얼마나 우스운 꼴인지는 압니다만. 강렬한 기억―가령 피아노에 관한 감각 비슷한 것들―은 생을 거듭하면서도 때때로 떠오르는 듯한데, 글쎄요. 그것 말고는 남은 게 없습니다. 좋아하지 않는 운명을 붙잡고 싶어질 정도로 소중한 게 생긴다면 분명 희망찬 이야기가 되겠으나 지금의 나는 그것을 바란다고 하긴 힘드니까. 어쩌면 피아노에 관한 것도 다른 삶을 산 나에겐 부정적인 기억일 수도요. 그런데 난 어째서 그것을 이번 삶에서도 거듭하고 있는지. 강렬하기만 하면 운명을 뛰어넘는 힘이 생기는 걸까요? 내게 부정적인 감정만을 남겨둔 것 또한. 그렇다면 조금 슬픈 이야기가 되겠죠. 좋아하지 않는 운명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구질거리는 것 또한 언젠가의 내가 좋아하지 않았던 감정들이라면.
잠시 사담이 길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나 또한 필멸을 바라는 존재로서 당신을 이해합니다. 이해하고는 있습니다. 다만 반대로, 그것을 납득하기는 힘드네요. 당신의 불멸을 내가 바람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해도 난 분명 그걸 바라지 않을걸요.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편지를 몇 장 나눠본 입장에서 당신이 관여한다고 해결될 일이 내겐 없는 것 같아서. 말이 좀 그런가요? 하여튼. 동창회는 내가 가지 못한 것에 잘못이 있으니 약속을 잡고 싶다면 맞춰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추천하진 않습니다. 정말로. 아마 편지로 보는 쪽이 당신이나 내게나 더 나을 거예요.
추신. 굳이 덧붙이지 않겠습니다. 보내주신 것엔 감사.
메피스토.
파란 핏자국이라니 새우 뇌밖에 생각나지 않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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