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신자: 담피르 -3-
  • 2023. 10. 1.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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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로운 탐정 담피르.

     사람에겐 법이 판단할 수 없는 저마다의 정의가 있는 법이죠.

     

     

     답신을 재촉하지 않는 가족―또는 혈연―을 두었다면 속없는 말이겠으나 조금은 부럽습니다. 아니라면 담피르 당신이 재촉을 보고도 무시할 수 있는 성격을 지녔다는 이야기가 될 텐데, 이쪽도 마찬가지로 부럽단 생각이 들어서 곤란합니다. 비슷하게 고향에서 줄곧 편지를 받고 있거든요. 거지 같아도 동족의 연인지 마냥 무시할 수가 없는 탓에, 꼬박꼬박 답신을 보내는 것도 이제는 일상이라서. 우리가 받는 편지의 내용은 거기서 거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근황을 묻는 말이라던가, 슬슬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냐던가 하는 말들.

     

     이 세상엔 특이하게도 스스로 살지 못한 과거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많은 듯합니다. 신기한 일이죠. 마찬가지로 저 역시 낡아버린 것들을 좋아해, 학부생 시절엔 종종 과거 선배들이 썼던 실험도구를 탐냈던 일도 적지 않게 있고요. 여하튼 전공과 다른 진로를 선택했는데도 종종 써먹을 수 있는 지식을 배웠다면, 그리 슬프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주 잠깐, 반짝 빛을 내더라도 그 역시 빛이니까.

     마법생명공학은 이름뿐이지 대부분이 생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니 사기당했단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런데도 조금 아쉬운 게 사실이죠. 저는 제 종족에 대한 사실이 궁금해 전공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가 무색할 정도로 홍해파리란 생물의 심층적인 정보값은 0에 가까워서(…). 그래도 후회라거나 그런 걸 하진 않습니다. 여러 생물들의 뿌리를 찾아가는 일엔 충분히 흥미가 돋더라고요.

     

     가지 않은 길에 결과는 없다는 걸 이제는 잘 아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걸 포기했던 경험을 떠올리면 아직도 조금은 쓸쓸합니다. 이렇게 또 여러 가정을 하고, 버리지 못해 끝내 이런 편지에 써 보내기나 하고요. 종이에 쓴 이 몹쓸 기억은 담피르 당신께서 대신 버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잠시 실례했습니다. 얼굴이 안 보이는 글씨체뿐인 상대에게 별말을 다 하는군요, 저도.

     

     붉은색이란 보통 '흡혈귀'라고 했을 때 생각나는 색이므로 문제 없을 듯합니다. 학부생 시절 팀 과제를 함께 했던 동기 중 양산을 가지고 다니던 동기가 있었는데, 당신의 말을 듣고 나니 그 동기도 흡혈귀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되네요. 회의 시간을 잡아야 하는데 밤이 편하다길래, 결국 오후 11시에 만났던 적이 있거든요. 재학 중 동족을 만난 적은 없나요?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만큼 낯선 종족은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다만 십자가를 보란듯이 남발하는 걸 보자니 어쩌면 흡혈귀란 철저히 매체에만 존재하는 종족이라고, 그렇게 다들 생각하고 있는지도모르겠습니다(…). 아무쪼록 힘내시길.

     더해서. 뒤늦게 생각난 건데 저 흡혈귀(추정) 동료와 오후 11시 회의를 진행했던 장소는 성당이었습니다. 그 동기, 단순한 햇빛 알레르기였던 걸지도 모르겠네요.

     

     전혀 무례하지 않으니 괜찮습니다. 사전 조사일 뿐이잖아요.

     정말로 불사인지는 모르겠으나. 고향에선 제가 모르는 일을 절 주체로 이야기하는 일이 굉장히 잦아서, 아마 그렇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이라는 말이 있죠. 괜히 나온 말은 아닐 거예요. 당신이 말한 영화의 주인공은 제법 단단한 사람인가 봅니다. 자신의 존재를 버리지 않고 기록해두는 불사의 존재라니 얼마나 멋진가요? 그러니 영화의 주인공인 거겠지 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쉽게도 저는 그리 단단한 존재는 되지 못해서, 추측하건대, 기록은 해두지 않고 있습니다. 만약 해두었다 해도 그다지 찾고 싶진 않네요. 얼마나 반복했는지 모르는 삶을 들여다 보자니 그 아득함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아서. 이 이름이 몇 번째 이름인지, 그 정도만 알게 된다면 충분할 듯합니다. 담피르 당신은 그 불멸의 삶을 사는 흡혈귀를 향해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까?

     

     가출 중이라니 가족들이 당신께 편지를 계속해 보내는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집안 막내가 가출했다면 저라도 몇 번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말을 빌릴까요? 아무튼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부디 가족들이 당신을 이해하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집안의 최소연자는 반항적으로 굴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보이는 일이 많은 것 같아요. 다만 시간이 많다는 건 부럽습니다. 언젠가 미래의 당신이 지금 이 시기를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면 주책이겠습니다만.

     바다가 그립지 않은 건에 대해. 아마도 제가 유별난 듯해요. 바다가 고향인 다른 동족들은 모두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걸 봤거든요.

     

     명함 잘 받았습니다. 디자인으로 받은 혹평엔 크게 신경쓰지 마시길. 어디에나 전공자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으니까요. 예전 명함이 궁금하긴 하네요. 혹시라도 청소 중 찾으신다면 그것도 한 장 부탁드립니다. 

     

     추신. 단 걸 먹으면 이상하게도 금방 잠이 쏟아져서요. 피하다 보니 어느새 싫어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단 것도 피하고 신 것도 멀리하다 보니 늘 마시는 게 고소한 종류밖에 없어서……. 여하튼. 최근 모 회사의 캡슐커피를 선물 받아 내려마셨는데 제 입엔 너무 달아 이후로 보관만 해두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커피 머신이 있나요? 있다면 조금 보내드리고 싶어서. 

     더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후로도 꾸준히 흡혈귀 관련 매체를 찾아봐야겠다 싶습니다. 당신을 포함한 일가족이 대부분 와인을 좋아한다면 유전자의 영향일 수도요. 미신에 가까운 말이지만 신기하게도 자주 들어맞더라고요. 자랑이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릴 테니 신경쓰지 마시길. 공부해둬야 할 게 늘었네요.

     

     

    메피스토 드림.

    사랑이든 우정이든 깊은 감정엔 늘 사건이 따라다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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