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피르.
커피 보내드립니다. 잘 도착했겠지요? 부디 취향에 맞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거 원, 의뢰를 드린 기억도 없는데 이렇게 낱낱이 파헤쳐지니 기분이 조금 그렇네요. 다만 다정함이라는 말에 대해선 선뜻 긍정할 수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얼굴 붉히길 싫어하는 사람일 뿐인지라. 어느 먼 편지 하나에 답장하지 않았다고 생길 갈등이라면, 차라리 조금 귀찮더라도, 결국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이라는 소리가 되지 않습니까? 지금도 그래요. 구태여 필수 아닌 답장을 이렇게 쓰고 있는 건, 곧 빠른 시일 안에 얼굴을 보게 될 당신과 어색한 사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단지 그 이유입니다. 물론 아주 단편적인 이유에 불과하며 진심을 말하자면 네 번째로 오고 가는 이 편지가 즐겁습니다. 일방적 방향이 아닌 필담이 즐겁단 말은 빈말이 아니거든요. 제게만 즐거운 거라면야, 음. 노력해보겠습니다.
담피르 당신의 추측이 맞습니다. 저는 외딴 바닷가 마을에서 저들끼리 살아가는 내 동족에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들과 소통하고픈 생각이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저 개인적인 감정이지요. 체념에 가깝다고 하면 당신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언젠간 스스로 원하지 않아도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걸요. 그런 짙게 깔린 체념에 저도 모르게 짓눌리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렇기에 반항도 할 수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아직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순간에 그곳을 벗어나보는 것. 유치하겠지만 그게 제 나름의 반항입니다. 무엇보다 제게 저번 삶이 있었다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 조금 꺼림칙한 게 사실이라서요.
지금의 제가 바다 내음을 그리운 향이라 느낄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으니 한 번쯤은 애써 그립다고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죠. 실제로 오래 찾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니까요.
탐정 일을 정리할 필요 있나요? 작은 파도도 결국 파도인 것을. 크고 작게 세상을 바꾼 사건들이 우리 주위에도 여럿 있지 않습니까. 그 사건을 해결한 당사자가 된다면 후에 당신의 이름도 그 하나만으로 크고 작은 파도를 일으킬지 모르죠. 학부생이었을 적의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는 그 삶을 쫓아가게 될 수 있는 일이고요. 다만 당신은 그 장본인이 되고 싶다 했으니, 음. 정말 탐정으로는 조금 힘들지 모르겠네요.
그런가요? 저는 흡혈귀의 시초를 따라가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피만 마시고도 살아갈 수 있을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물론 세상이란 게 늘 공평하진 않듯이 누군가는, 가령 저와 편지를 나누고 있는 누군가께선 그 시스템에 불만을 가지고 계신 듯 보입니다만. 이해는 합니다. 당장 이전 편지만 봐도 당신이 열렬히 해명했던 게 남아있는걸요(…). 그렇다 하더라도 스스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적지 않게 살아가야 할 삶을 야만적이라 칭하면 되나요. 요즘 세상엔 동물과 인간이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듯합니다. 당장 제 동족만 봐도 인간보단 동물 쪽이 많고.
사람은 대개 소중한 사람에게 진심을 털어놓지 못합니다. 어쩌면 소중한 사람까지 갈 필요조차 없을지 몰라요. 참 신기하지 않나요? 얼굴을 자주 맞대는 사람에겐 못할 이야기를, 한 번 스쳐지나가고 마는 사람에겐 잘도 털어놓는 그 모습이. 당신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탐정이 아니라 줄글 조금으로는 남을 다 파악할 수 없거든요. 다만 애써 묻지도 않겠습니다. 당신 또한 제게 유예 기간을 주었으니까.
무엇을 포기했느냐에 대한 제 답은 결국 미루는 꼴이 되겠네요. 미루는 건 학부생 시절 과제로 끝일 줄 알았는데.
성당에 면역이 있는 흡혈귀라니 마니아들이 환장할 소식이네요. 신부가 된 친구분께서도 그렇고요. 보통 그런 경우엔 제 종족을 비밀로 두고 살아가는 편일까요? 해명하는 것도 일이니 비밀로 두고 살아갈 것도 같습니다만. 으음, 이것도 제가 그 종족과는 연관되지 않은 외부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겠죠.
맞지 않을지언정 의견을 나누는 것까지 주저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저는 불멸을 부러워하는 당신이 마냥 신기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언젠가 봤던 소설이 생각나 그 의견에 수긍하고 맙니다. 당신 또한 그 영화의 주인공과 다르게 삶을 기록하지 않는 제 모습에 의문을 느낄 수도 있겠죠. 때때로 필멸을 바라지만 이 사실을 남들 앞에선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과 제가 느끼는 삶의 무게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기 때문에. 그러니 필멸을 바란다는 말은 당신 앞에서 처음 하는 게 되겠네요. 결국 당신이 불멸을 바라는 것과 비슷한 이유일 겁니다. 근본적으로는 정반대가 되겠습니다만, 염원하는 마음만을 놓고 본다면야.
으음. 비슷한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탐정이라는 것이 쉽게 후회하는 성격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이죠. 후회가 잦더라도 금방 털어낸다면 또 모르겠으나. 후회가 많은 사람의 대부분은 언제까지고 그 기억을 애써 이고 가더군요. 이러나 저러나 세상엔 그런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뻔뻔한 사람이 있으면 남 눈치 많이 보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법이고요. 보통 그런 사람이 의뢰자의 신분으로 당신을 찾아가는 거겠죠?
추신에 대한 답변. 간식이야 보내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책상에 오래 앉아있다 보면 간식거리를 찾게 되더라고요. 생강차는…… 예, 그것 또한 보내주신다면 감사히. 교수님께 타드리면 좋아하실 것 같고…….
메피스토 드림.
명함에 대해. 좋은 말만 쓰려고 노력했으나 핏자국은 아무래도 빼는 게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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