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년차, 늦봄
안녕, 내 오랜 벗. 내가 지내는 이곳엔 이제 매화 향이 멎었어. 때때로 비가 오고, 서서히 해가 길어지는 걸 보니 슬슬 봄이 저무는 모양이야. 난 요즘 잘 지내. 네게 온 서신을 읽어줄 벗도 여럿 생겼어. 희소식이지? 그러니까, 부디 너도 잘 지내고 있길 바라. 내 걱정은 말고.
추신. 속아,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연주하기 알맞은 상태의 현이라는 것 말이야.
― 1년차, 겨울
소식 전해 들었어. 그곳 사람들 사이에 잘 섞였다니 다행이야. 실은 조금 걱정하고 있었어. 속이 넌 늘 너 아닌 다른 벗 한 명만을 곁에 두고 살았다면서. 그리고 그 삶의 마지막 상대가 나였던 거고.
있지. 괜찮아. 그 이야기를 들어도 이젠 아무렇지 않아.
……음, 아니. 아무렇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예전처럼 며칠 내내 귀를 막고 있을 정도는 아니니까. 그러니 다시 말할게. 부디 걱정하지 마. 여기엔 내가 홀로 그렇게 있으면 꺼내줄 아이들이 많거든. 너무 많아서 탈이지. 어제도 말이야, 무슨 일이 있었냐면……
― 2년차, 장마
안녕, 속아. 원래는 가을쯤에 붓을 들려고 했는데 말이지. 요즘 빗소리가 거슬려서 잠 못 이룬 날이 많아. 여기도 이런데, 네가 사는 곳은 산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면서. 걱정을 놓을 수가 없어서 결국 붓을 들었어. 아무 일 없지? 부디 그랬다면 좋겠다. 이곳은 그런대로 괜찮아. 문제가 있다면 거문고에 있는 게 전부니까.
……음, 걱정하지 마. 요즘은 하루 종일 거문고 곁에 있는걸. 제대로 연주하지도 못하면서 거문고가 망가지는 건 싫다니, 조금 모순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젠 거문고를 제법 연주할 수 있게 되었어. 기대한다고 말해준 아이가 있거든. 그런 말을 듣고 나니까, 그저 가만히 두고 볼 수만은 없더라. 종종 몰래 연주하다가 들키기도 해.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거문고 소리 말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는데, 그게 참 신기한 것 같아. 너도 이런 적이 있을까?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는 날 이야기를 들려준다면 좋겠어.
추신. 있지, 난 이제 이 이름이 조금 괜찮아졌어. 내 거문고 연주를 기다려주는 누군가 덕분에.
― 2년차, 가을
속아.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네. 내가 있는 이곳엔 이번에 건국제가 열렸어. 사람이 무지하게 많이 몰렸다고 해. 혹시 너도 왔을까? 왔다면 분명 기쁠 거야. 이 축제, 요괴와 인간의 화합을 축하하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대.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겐 충분히 의미 있는 축제가 아닐까 생각했거든.
물론, 난 여전히 이곳에 있었지만. 다녀왔다간 하루 종일 머리가 시끄러울 것 같아서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벗들이 길을 헤매지 않고, 이곳으로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누군가는 남아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이곳에 줄곧 있었어.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그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나는 알 수 있으니까.
아이들이 돌아올 때쯤엔 마중을 나갔는데, 여럿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흙을 차고 달려오는 그 소리가 참 좋았어.
― 3년차, 겨울
새해 복 많이 받아. 내가 있는 이곳엔 이번에 설이라고 열흘 정도 시간이 비었어. 연휴에도 그동안은 늘 이곳에 남았는데 말이지, 이번에 처음으로 밖을 나가 고향에 갔어. 내가 아직 열넷일 적 네가 날 데리고 빠져나온 숲. 축축한 바람, 옅은 빛이 고작이었던 그 고향엘 갔어. 이곳의 벗에게 언젠가 했던 말이 있거든. 난 약속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약속이란 말의 힘을 믿으니까. 놀랍지 않아? 내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서 그 숲에 다시 갔다는 게. ……나 스스로도 다시는 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숲인데.
정말 밝은 벗이야. 난 태양빛을 모르는데도 그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면 태양이 생각나. 언젠가 너와 함께 볼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릴 정도로. 그 애가 그러더라. 자기가 본 것들은 내 추억의 일편들뿐이지만, 그래도 나를 조금 더 알아간 것만 같아서 기쁘다고. 나는…… 사실대로 말하면, 그동안은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없이 그리움만으로 찾았던 고향이거든. 그런데, 이번에 그 아이 덕에 좋은 추억이 하나 생겨서 기뻤어. 다시 찾아갈 이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번에 알았어. 우리가 건너온 그 강이 생각보다 작다는 사실을.
속아, 우리가 다시 만날 날이 어쩌면 금방일지도 몰라.
― 3년차, 여름
요즘 통 연락이 안 닿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난 여전히 잘 지내. 협죽회가 열렸고, 난 참여하지 않았지만. 오랜만에 바깥사람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 네가 있는 마을도 이곳처럼 시끌벅적했으면 좋겠다.
추신. 난 내기는 하면 안 되는 것 같아. 누가 우승할지 벗들과 내기를 했는데, 내가 응원하는 아이들만 후보에서 점점 사라지더라….
― 3년차, 늦가을
속아. 요즘 심심찮게 소문이 들려. 곳곳에서 괴현상이라고 무언가 나타나는 모양이야. 아직까지 인명피해는 없는 모양인데, 사실 잘 모르겠어.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면? ……그리고, 언젠가 그 대상이 네가 된다면 어쩌지?
있지. 잘 지낸다는 말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부디 서신 보내주었으면 좋겠어.
― 3년차, 다시 겨울
잘 지내고 있지? 오랜만에 꿈에 네가 나와서 붓을 들어.
사실, 꿈이라고 해도 이번엔 조금 달랐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젠 익숙한 어둠 속에서 네가 들려주는 거문고 소리를 그저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 연락이 닿지 않은 지도 오래됐고, 네 목소리도 그리워졌으니 조만간 한 번 찾아가려고 해. 거문고를 가지고 찾아갈 테니, 부디 다시 들려주길 바라. 서툴러도 웃지 않을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내가 열여덟이 되는 새해에 보자.
― 4년차, 새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얘들아. 나 괜찮아. 오는 길에 조금 넘어져서 그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다들. 그냥, 닦을 거 하나만 주지 않겠어?
― 4년차, 봄
……있지. 나, 손이 움직이질 않아.
익숙한 바람에 숨이 막혀서 네 이름도 부를 수가 없어. 미안해.
― 4년차, 여름
저기, 나 이제 괜찮아.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대련 상대 한 번만 되어주지 않을래?
― 4년차, 다시 가을 지나 늦겨울
안녕. 우리가 함께 이곳에 오는 건 오랜만이지?
난 이제 혼자서도 강을 건널 수 있게 됐어. 그래서 이곳엔 우리 둘뿐이야.
……그래도, 약속은 지켰네. 내가 혼자 강을 건널 수 있게 되는 날 다시 보자더니.
있지. 난 이제 꽤 괜찮게 지내.
물론, 아닐지도 몰라. 내 다른 벗들은 아마 아니라고 하겠지. 여전히 난 네 이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내가 사랑했던 바람이 내게 돌아오는 게 두려워서, 권능을 사용할 때마다 숨을 참게 돼. 앞으로는 거문고를 연주할 수 없을 것만 같아. 손이 영 움직이질 않거든.
……그래도, 그래도 말이야. 너만은 내가 괜찮게 지낸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언젠가 이 이름을 괜찮다고 말해주었던 것처럼.
…….
고마웠어, 내 오랜 벗.
난 이제 꽤 괜찮게 지내.
얘들아. 나 다녀왔어. 봐, 이번엔 멀쩡하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어딜 다녀왔냐고? ……그냥. 고향에 일이 있어서, 잠깐 다녀왔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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