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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3. 7. 20.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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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져 나온 숨 같은 네 웃음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에조차 웃고 있었다. 네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웃는다. 아니, 어쩌면 그래서 웃는 것일 수도 있겠다. 몇 번의 숨이 멎고, 다시 터지길 반복하면, 그제야 말을 잇는다.) 열여덟 가을부터 그런 생각을 했었어. 결국 모든 관계는 연鳶과 같고, 그러니 언젠가 적당한 때 줄을 끊어서 날아가게 두어야 한다고. …난 그 아이에게 결국 연이었던 거야. (긴 침묵 끝에 이어진 말. 끝내 부르지 못한 이름이지만 너라면 누군지 알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 덧붙이지 않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생각하게 돼. 거문고와의 연도 끊어 날려주었으니 슬프지만, 이젠 널 날려주어야 할 때가 온 걸까, 하고. 졸업하고부터 줄곧 네 생각을 할 때면 그것밖에 떠오르질 않았어.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런데도 네게 온 서신을 못 본 체 할 수가 없더라. (언제나 결심뿐이었어. 그리 중얼거리며 쓰게 웃는다. 식신, 그 아이를 소환하지 않게 된 것은 졸업 직전 고향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후였으므로, 네 서신을 읽어줄 누군갈 찾아 늘 헤맸다는 사실은 구태여 말하지 않고 삼킨다.) 

     

     응. 무서울 만도 하지. 열넷부터 열여덟, 자그마치 4년이야. 그 긴 시간조차 의심하게 만드는 변화라니 어느 누가 무섭지 않겠어. (아무것도 삼킨 게 없는데 입이 쓰다. 말도 숨도 쓰니 삼킬 수가 없어 모두 네 앞에 뱉기로 한다. 아니, 입을 열 때마다 말이 쏟아졌다. 이 순간 누구의 의지인지 알 길이 없다.) 내가 모르고 네가 아는 기억이라니, 얼마나 못된 짓이야. 그러니 네가 그 반 년의 시간을 잊었으면 했는데. 아무래도 내 욕심이었나 보다. 그래도, 너 자신을 탓하는 일은 없어야지. 함께 있는 와중에도 널 혼자 두었던 날 탓해야 하지 않겠니. 그래야 내 마음도 조금 편할 텐데. (농조로 중얼거린 말. 다만 진심이었다. 이어진 말에도 마냥 기뻐하는 법이 없다. 같은 종류의 슬픔이 돌아오는 게 싫어 입을 다물고만 있었더니 결국 그게 네 슬픔이 되어 돌아오는구나. 끝내 흘러나온 그 힘없는 사과의 말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저 생각했다. 저 말이 날 향한 사과인지, 너 자신을 향한 변명인지 모르겠다고. 그러나 감히 바라건대 그게 후자였다면 좋겠다고.) 있잖아. 난 이제 '예전이라면'으로 시작하는 말을 할 수 없게 됐어. 기억이 조각나서 내가 말하는 '예전'이 어딘지 스스로도 모르는 건 둘째치고. '예전이라면', 하고 말을 하는 나는, 그래서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가 없어서. 그러니 네가 화낼 만도 해. 벗이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이 되어 돌아왔으니.

     

     ……우리가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긴 한가 봐. 이젠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감조차 잡히질 않아서 큰일이네. (다시 말끝을 흐리고, 이어지는 침묵. 이젠 어색해진 침묵에 마찬가지로 어색한 대답을 했다. 다만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으니. 혹여 깨지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네 눈가를 쓰다듬고, 손등으로 뺨을 쓸었으나 그 감상은 똑같다. 여전히 알 수가 없어. 오랜 벗의 얼굴 하나 알 수 없다는 사실에 조금 서글퍼져 쓰게 웃고, 손을 떨구려는 찰나, 네게 손목이 붙잡혔다. 무언가 둔탁한 소리를 눈치챘으나 그 소리에 반응할 새도 없이 숨이 멎는다. 터져 나와야 할 숨이, 네게 익숙할 웃음이, 어쩌면 이 순간 차게 식은 바람까지도. 그러나 와중에 터져 나온 것이 있다.)

     

     매요, 오랜만이라 반가운 건 알겠지만 힘 좀 푸는 게 어때. …누가 보면 내가 도망이라도 치려는 줄 알겠다. (목소리고, 말이다. 어쩌면 다신 번복하지 못할, 어쩌면 결심과도 같은 것. 도망가지 않겠다는 말. 서툴게 쓰다듬는 손길과 중얼거리는 이름에 픽 웃고 만다. 전해져오는 온기는 어린 날과 같은데, 자기보다 커진 품에 영 적응할 수가 없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붙박인 듯 온기를 받아내고만 있었다. 그러나 곧 툭, 마찬가지로 둔탁한 소리를 낸다. 네 손에서 넘어진 검 위에 지팡이가 함께 눕는다.)

     (이런 것까지 어린 날과 같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퍽 가벼워진 두 손으로 서툴게 널 마주 안기로 했다. 난 아직 여기, 네 곁에 있다고. 그러니 그렇게 슬프게 부를 필요 없다고. 매요, 우리가 서로를 끊어내기엔 아직 너무 이른 것 같다. 이어진 서글픈 목소리, 옅게 웃음 지은 채 팔에 힘을 주었다.) …암흑은 내 벗이고 고요함은 내 가족이지. 어쩌면 이게 맞는 걸지도 몰라. 매요, 내가 외로움에 못 버텨 그동안 너희를 찾아다닌 걸지도 몰라. 그런데, 난 이제 혼자여도 꽤 괜찮게 지내. 다가오는 마음으로부터 도망치느라 발이 조금 아픈 걸 빼면 말이야.

     

     (그러나 어쩐지 네 앞에만 서면 그 아팠던 발도 괜찮아졌다. 네가 날 단단히 붙잡았기 때문인지, 내가 도망치길 포기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니, 그저 도망치기 싫은 것일 수도 있겠다. 고요함을 더는 네게 남겨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네가 팔에 힘을 풀면, 조금은 느리게 떨어졌다. 어린 날의 미련조차 여전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참, 지켜보기까지 할 거라니. 아무래도 잘못 걸린 모양이네. 넌 여전히 날 놓아줄 생각이 없구나. 많이 큰 줄 알았는데 여전해, 정말. (농조로 중얼거린 말 뒤에 작은 결심이 따른다. 우선은, 네가 아는 빛을 빌리는 게 좋겠다고. 네가 배운 빛으로 발밑을 비추다 보면, 언젠가 아침 해가 뜨는 곳에 다다를 수 있겠지. 내가 처음으로 깨닫게 되는 빛 옆엔 네가 있는 게 좋겠다. 그리고 부디 그것이 희망이길 바랐다.)

     ……그래. 이번만큼은 네가 내민 손을 잡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뿌리치지 않고, 아침이 올 때 그 곁에 있는 것도… (말을 흐린다. 그러다 곧,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 순간 우리의 시선이 맞닿았다면, 그건―) 꽤 멋진 장면이 되겠지.

     

     

    영원한 밤은 없을 테다. 분명 내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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