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그러게. 네 말이 맞아. 세상 일이 그런 걸 어쩌겠어. (그저 네 목소리에 서린 게 슬픔이구나 생각했다. 어쩌면 내 목소리도 똑같을지 몰라. 알고도 남을 상처 입혔다면 악인이고, 눈속임뿐만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진짜를 대체했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짜가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는데도. 그런데도 어쩐지, 부정하고만 싶어져서. 소년은 입을 다문다. 그러다 다시 입을 뗐다. 그저, 네가 말하는 진심이 퍽 듣기 좋아서. 이유는 단지 그뿐이다.)
맞아. 처음 한 편으로는 기쁘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슬퍼질 거야. 나는 그 애의 눈을 볼 수 없으니까, 그 애가 날 통해 누구를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들리는 목소리에서 충분히 알 수 있어. 이 말, 날 향한 게 아니구나. 그리고 의심하겠지. 내가 '백아'란 이름을 부정한다면, 그때도 그 애는 날 벗이라고 불러줄까, 하고서. (그럼에도 그 호의에 남겠다는 네 말.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우리는, 참. 비슷하면서도 다르구나. 넌 남겠다고 했지. 하지만 나는 지금 네 앞에 있는 것처럼, 이렇게 떠나와버렸으니까. 그 애도, 나도 서로 같은 핑계를 대며 이곳으로 왔어. 그 애는 내게 세상을 보여주고 싶다 했고 난 그 말에 그저 수긍했지. ……그러다가, 그만 심한 말을 해버리고 말았어. 날 떠나서, 다신 오지 말라고. 물론, 그 뒤에 농담인 것처럼 덧붙였지. 그땐 내가 찾아갈 테니 다신 오지 말라고. 하지만, 너라면 그 말을 믿겠어? (이야기에선 유쾌한 구석 단 하나 찾아볼 수 없었지만 어쩐지 소년은 웃고 있었다. 후회하고 있을까.) 아상아,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이 이름의 원래 주인이 나인지, 그 애인지, 그 애의 소중한 누군가인지. 이젠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조차 희미해.
……그런데, 이건 아마 너 때문인 것 같아. 무엇을 바라는지 희미해지는 건 말이야. (내게 초아상은 너인 만큼, 너에게 백아란 사람 또한 나일 거라는 생각 끝에 도출해낸 결론이었다. 생각 좀 해보라면서 구태여 뻔뻔하게 말하진 않았으나.)
(옅은 떨림. 손끝에 눈물이 닿으면 그 떨림은 옮고 만다. 작게 탄식했나. 금방 거두려 했던 손이지만 마음을 따르는 일은 종종 쉽지가 않다. 내가 다가가는 게 아니라, 어쩌면 네가 다가오는 것일지도 몰라. 그러한 생각 끝에 무심코 손이 굳어 뻣뻣해진다. 어떻게 손을 써왔는지조차 잊고 이 순간 네 눈물을 가만히 받아내고만 있었다.) ……그럼에도 내게 그 말을 한다는 건, 결국 변명하지 않겠다는 뜻이구나. (그러다 이어지는 말. 네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단 생각은 전혀 들지가 않아. 이 시점 소년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다.)
……자. (이거라면 충분히 대답이 될까. 긴 소매 사이로 늘어뜨린 네 손을 찾아, 멋대로 잡아채고, 멋대로 약속이라도 하겠단 것처럼 손가락을 거는 것 말고 소년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네 손을 잡아챈 손이 눈물에 젖어 축축했다. 네가 쳐내지 않으면, 손가락은 여전히 마주 걸린 채로, 그렇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어진 말은 제법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말이 멈추고, 웃는다거나, 차게 식었다거나. 그런 감상을 남길 여유조차 남아나질 않는 말들의 연속. 그러다 보면 생각나는 게 하나. ……아, 뻐꾸기 이야기.) …저기. 이야기해 주어서 고마워. 하지만 미안하단 말은 안 할 거야. 이건 내 이야기를 대가로 네가 한 이야기니까. (문득, 말이 멈춘다. 그렇게 꼬박 3년이 흘렀고, 너는 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 뒷이야기를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애정이 자신을 향한 애정이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하는 이는 단 한 명뿐인데, 그 한 명에게서 받는 사랑조차, 얼마나 크게 다가갔을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니까. 그저 소년은 말한다. 저 어린 불안함이야말로 익숙한 고민이었고, 자신조차도 채 끝내지 못한 고민이다. 그래도, …….)
모든 걸 돌이키고 싶다면서. 아무도 남지 않을 거라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그런데, 있잖아. 아니야, 초아상. 아상아. 그럼에도, 그 끝에 네가 남아.
봐, 네 눈앞에 내가 있지 않니. 내게도 내가 남은 것처럼, 분명, 네게도.
* 그림 로그는 지인께서 도움 주셨습니다. 편하게 댓글로 주셔도 됩니다(정말)…… 감사합니다!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