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들레
  • 2023. 7. 7. 21:14
  •  (타의로 가짜가 된 사람과 스스로 가짜가 된 사람 중 누가 더 불행할까? 그것이 의미 없는 고민임을 알아 소년은 곧 생각하길 그만두었다. 누구의 의지인지 우리에게 있어 결코 빼놓을 주제가 아님에도, 그것보단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알기에. 그 두 사람 모두 결국엔, 타인에게서 받는 호의가, 사랑이 그리워 그 자리에 한참을 있었던 것이니까. 다른 점이 있다면 이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는 점에 있을까. 그러나 스스로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만은 눈치챈 채로, 다만 알면서도 묵인하고 그 자리에 남고 싶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상대 쪽에서 먼저 이별을 꺼냈기 때문에. 그러다가, 문득 그 목소리에 서린 마음이 너와 닮아있단 생각을 했다. 혼자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을 때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하던 음성이, 여전히 상냥하면서도, 결국엔 떠나겠다 다짐했던 그 단호한 목소리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 (그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괜히 입 밖으로 내어본다. 네 걸음 닿는 곳, 그곳이 어디인지 예상조차 못 하는 주제에, 감히 어느 지점에서 한 번쯤은 만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버리고 말아. 굳게 얽혀 있던 손가락이 풀리고, 곧 떨어져도 소년의 손은 한참 네 앞에 있다. 일종의 미련일지도 모르는 마음이다. 그러다, 이어진 이야기에, 그제야 손이 떨어진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천천히, 아래로. 또 아래로. 결국엔, 원래 있던 자리까지.) ……응. 네 말이 맞아. 그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제라도 좋으니, 종종 네가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그 찰나의 과정에, 부디.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바라 마지않는 것이었고 다만 기대도 역시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꺼내지 않은 말.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소년은 그저 웃었다. 침묵은 때때로, 최고의 대답이 되어주었으니까.)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정한 사람이 아닐지도 몰라. 아니, 아마 아닐 거야. (다정하단 말에 유독 침묵은 길게 이어진다. 네가 눈치채지 못한 채 남겨두었으면 좋았을 침묵이지만 차마 그러진 못했다. 타인의 진실 앞에 제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소년이 생각하기에 적절한 행동은 아니었으므로. 긴 침묵 끝에 목소리는 바닥으로 흐른다. 언젠가의 눈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은 흘러 뚝뚝 바닥에 박히기만 한다.) 나 역시 소중한 사람의 이름을 다른 아이에게 준 적이 있으니까. 네가 그랬지? 사이가 좋아 돕게 만든 건 내 능력이라고. 거기에 난 답했어. 이 아이가 착한 탓이라면서. 그렇게 예쁘지 않다고 말했던 이름이 누구의 것인지는.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 거야. 그렇지? 이미 넌 알고 있어. (그러다 문득 제 손을 숨긴다. 모든 원망도 한 톨의 그리움을 이기진 못했다. 떠난 제 벗이 그리워 결국엔 새 벗에게 그 이름을 주고 만다. 실은, 소년 또한 누군갈 원망해선 안 될 처지였던 거다. ……그저 잠시, 식신을 무른 건 옳은 행동이구나 생각했다. 차마 네 얼굴에 드러날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아.) ……내 식신, 속이가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아이는 그저 받아들여주었다는 것뿐이야. 싫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으면 내가 알았을 텐데. 그래서 더 미안하게만 느껴지나 봐.

     

     

     (그렇게 망설이다 토해내는 말. 그러나 마지못해 한 말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게 네 진심이라면, 마땅히 거기에 응해주어야 하는 거겠지. 하지만, 그런데도. 결국 끝에 남는 것은 이별이겠지만 소년은 그 위에 무언갈 덮으려 했다. 그런다면, 분명 그 이야기를 들춰볼 때 망설임은 덜할 테니까. ……그럼에도 예정된 이별은, 몇 번이고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구나. 그저 그리 생각했을 뿐이다.) 있지. 나는 꽃을 볼 수가 없어서, 어느 꽃이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그저 소소하게 길가에 채이는 꽃인지 알 수가 없어. 그저 향기로 구별할 뿐이야. 봄이면 길가에 매화 향이 나.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하지. 매화가 폈구나, 올해도 참 예쁘다, 하고. 그런데 다른 꽃들엔 눈길을 주지 않아. 그래서 내가 아는 봄의 꽃은 매화뿐이야. 난 매화로 봄을 알고, 수국으로 여름을 깨닫고, 늦게 피는 국화로 가을이 왔다는 걸 알아. 겨울엔, 그 모든 것 위에 눈이 내려앉지. (결국 자연 안에 있는 한 꽃이나 사람이나 모두 같아. 우리는 지금 어느 계절에 있을까. 부디 어느 계절이어도 좋으니, 조금은 늦게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꽃은 영원하지 않아. 언젠가 져서, 땅에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밟히기 마련이야. 그런데도 일 년이 지나 같은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피어나니까. 분명, 너도 그럴 거야. 너도 마찬가지인 거야.

     

     (네가 어느 곳에 있어도 내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느 청아한 밤하늘 아래 오간 이야기처럼, 이제 나는 충분히 잘 살고 있다고. 그런 이야기들이 돌고 돌아 내게로 왔으면 좋겠다.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끝내 언제나 곁에서 피어나는 민들레처럼. 힘겹게 떨어진 손이 다시 붙잡히고, 네가 웃으면, 담담히 말을 잇는다. 네 앞에서 변한 적 없던 단조로운 어조로, 소년은 끝까지.) 그러니 부디 네 말처럼, 네가 시작이라면, 언젠가 똑같이 이 계절에 알게 해줘. 이 계절에 우리가 있었다고, 그렇게 알 수 있도록. ……난 잊지 않아. 이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그 끝에 네가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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